역전 현상 — 조례가 법보다 먼저 왔다
한국 사회적경제 정책의 가장 특이한 점입니다. 기본법이 13년째 표류하는 동안 조례는 전국에 깔렸습니다. 광역 17개 시도 대부분과 상당수 기초자치단체가 사회적경제 육성·지원 조례를 갖고 있습니다.
이 역전이 두 가지 결과를 낳았습니다. 좋은 쪽으로는, 중앙정치의 교착과 무관하게 지역에서 실행이 축적됐습니다. 나쁜 쪽으로는, 상위법이 없어 조례의 근거가 취약합니다. 지방자치법상 주민의 권리 제한이나 의무 부과는 법률 위임이 필요하므로, 조례는 '지원과 촉진' 범위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예산 편성의 안정성도 단체장 의지에 달립니다.
조례의 층위
실제로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겹으로 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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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조례 — 사회적경제 육성 및 지원에 관한 조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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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문별 조례 — 사회적기업 육성, 협동조합 활성화, 마을기업 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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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로 조례 — 사회적경제 제품 구매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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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원 조례 — 사회적경제 기금 설치·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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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접 조례 — 마을공동체 만들기, 도시재생, 주민자치
문제는 표준안 복사입니다. 상당수 조례가 유사한 문안을 옮겨와 지역 특성을 반영하지 못했고, 제정은 됐으나 시행규칙과 예산이 따라붙지 않는 '장식 조례'가 적지 않습니다. 앞서 PAP에서 겨냥하신 법과 실행의 격차가 국내 지방정부 층위에서 그대로 나타나는 셈입니다.
거버넌스 기구 — 구조적 취약성
민관 협의체(사회적경제위원회)와 중간지원조직(사회적경제지원센터)이 두 축입니다. 중간지원조직이 실질적 실행 주체인데, 여기에 결정적 약점이 있습니다.
대부분 민간위탁입니다. 2~3년 단위로 재위탁 심사를 받고, 단체장이 바뀌면 존폐가 흔들립니다. 축적된 인력과 지역 네트워크가 계약 종료와 함께 흩어집니다.
이것이 추상적 우려가 아니라는 걸 최근 2년이 보여줬습니다. 고용노동부 스스로 2024~2025년 예산이 급격히 축소되고 민간지원기관이 폐지되면서 지역 기반 생태계가 급격히 약화되고 현장의 정책 신뢰가 저하됐다고 진단했습니다. 서울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의 부침은 그 대표 사례입니다.
브라질과 구조가 같습니다. 룰라 정부가 만든 연대경제 국가사무국이 보우소나루 정부에서 해체됐다가 다시 복원된 궤적을, 한국은 지방정부 층위에서 반복했습니다.
다섯 가지 쟁점
① 정치 종속성. 단체장 교체가 정책 존폐를 결정합니다. 조례가 있어도 예산과 조직은 재량 영역이니까요.
② 재정자립도의 역설 —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국비 사업 대부분이 지방비 매칭을 요구합니다. 2026년 지역 협력생태계 사업만 봐도 국비 137억에 지방비 59억, 사회성과 인센티브 시범사업은 국비 50억에 지방비 50억으로 1:1입니다.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자체일수록 매칭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즉 사회적경제가 가장 절실한 지역이 가장 참여하기 어렵습니다.
③ 부처 분절의 지방 재생산. 중앙의 칸막이가 지자체 부서로 그대로 내려옵니다. 사회적기업은 일자리경제과, 협동조합은 경제정책과, 마을기업은 자치행정과, 자활은 복지과로 갈리고, 조례도 그에 맞춰 따로 있습니다.
④ 참여의 형식화. 사회적경제위원회가 연 1~2회 심의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앞서 본 정책 공동구성(co-construction)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⑤ 금융의 부재. 지역 사회적경제 조례 어디에도 지역 금융기관이 거버넌스 주체로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기금을 만들어도 운용 역량이 없어 예치에 그치는 경우가 많고요.
국제 비교 — 계획의 구체성이 갈린다
스페인 발렌시아가 참고할 만합니다. 2015년 좌파 연합 집권 후 사회경제 변혁 협약을 맺고, 발렌시아협동조합주의위원회가 2018~2019년 격년계획을 승인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각 사업의 담당 주체와 배정 예산을 명시하고 2년 후 평가를 예정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례가 대체로 선언에 그치는 것과 대비됩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2020년 시 법률로 세금 감면, 시립은행 전용 여신, 우선구매, 투자기금(FONDES), 등록제를 한 묶음으로 도입했습니다. 금융을 거버넌스 안에 넣었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서울은 UNRISD 연구를 통해 국제 문헌에 인용되는 유일한 한국 사례인데, 정작 그 정책 기반이 이후 축소됐다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2026년 — 행안부 체제로의 전환
행정안전부가 '사회연대경제 성장 촉진'을 국정과제로 삼았습니다. 소관이 고용부·기재부 분산에서 행안부 중심으로 재편되는 흐름이고, 사회연대경제기본법도 행안위 소관입니다.
2026년 사회연대경제 혁신모델 발굴·확산 공모에 신규 예산 85억 원이 배정됐고, 17개 시도가 지역 여건에 맞춰 6개 유형 중 선택해 설계하도록 했습니다. 표준안 복사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읽힙니다.
대구 사례가 특히 눈여겨볼 만합니다. 행안부 공모 우수모델로 선정돼 국비 5억 + 시비 5억, 총 10억 원 규모로 추진하는데 신한금융그룹이 참여합니다. 지방정부·중앙부처·민간금융의 3자 구조입니다.
생각해 볼 점
첫째, 대구 사례에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왜 신한금융그룹인가? 대구·경북에는 새마을금고와 신협이 촘촘히 깔려 있고, 이들이야말로 지역에 뿌리내린 협동조합 금융입니다. 그런데 지역 사회연대경제 생태계 파트너로 시중은행이 들어왔습니다. 지역 금융기관이 지역 사회연대경제 거버넌스에서 배제되어 있는 구조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2022년 「금융협동조합과 지역 상생 온라인 플랫폼」 논문의 문제의식이 정확히 이 공백을 겨냥하고 있었고, 이제 실증 사례가 생겼습니다. 게다가 영남대가 경산이니 현장 접근성도 좋습니다.
둘째, 재정자립도 역설이 수도권/비수도권 명제의 새 검증 영역입니다. 지방재정 연구는 대구경북연구원 시절 이미 하신 영역이고(2011년 지방세법 개정과 자치구 재정형평), 그때의 도구가 그대로 쓰입니다. 재정자립도가 사회연대경제 정책 역량과 성과에 미치는 영향을 시군구 패널로 추정하면, 지금까지 금융포용에서 반복 확인하신 지역 이질성 명제가 정책 역량 차원에서도 성립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이미 12년 패널 구축 경험이 있으니 데이터 부담도 적습니다.
셋째, PAP의 국내 예비연구가 됩니다. 조례는 있는데 실행이 없는 상태를 시군구 단위로 측정하는 작업은 PAP의 de jure–de facto 격차 측정과 방법론이 동일합니다. 국내에서 먼저 지표와 설문을 검증한 뒤 16개국으로 확장하면 PAP의 방법론적 신뢰도가 올라가고, 베이스라인 논문에 국내 사례를 비교군으로 넣을 수 있습니다.
넷째, 광주 경험이 자산입니다. 광주광역시 성과평가위원, 창업지원센터 운영위원, 동구청 발전혁신위 산업분과위원장, 그리고 광주형일자리 연구까지 — 지역 거버넌스에 실제로 참여하며 관찰한 이력이 있습니다. 광주형일자리에서 확인하신 "사회적 타협 구조의 제도화가 확장의 전제조건"이라는 결론은 사회연대경제 지역 거버넌스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명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