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EMES, 라틴아메리카 economía solidaria, 영미권 사회적기업론
세 학파는 같은 현상을 보는 다른 관점이 아니라, 애초에 다른 문제를 풀려던 기획입니다. 유럽은 복지국가 재편, 라틴아메리카는 구조조정 이후의 생존, 영미권은 비영리의 재정난에서 출발했습니다.
한눈에 보는 대조
EMES (유럽) | Economía solidaria (라틴아메리카) | Social enterprise (영미) | |
촉발 계기 | 복지국가 재편, 이탈리아 사회적협동조합법(1991) | 부채위기·구조조정, 비공식 부문 팽창 | 레이건·대처의 사회지출 삭감 |
행위 주체 | 집합적 기업가정신 | 사회운동과 민중 | 개인 사회적기업가 |
거버넌스 | 정의를 구성하는 요소 | 자주관리 — 위계 자체를 거부 | 정의에서 사실상 제외 |
시장과의 관계 | 공존·혼합 | 대안·저항 | 수단으로 활용 |
국가와의 관계 | 정책 공동구성 파트너 | 요구하되 포섭 경계 | 서비스 계약·외주 |
비공식 부문 | 제외 (등록 법인) | 포함 (핵심) | 제외 |
성공의 척도 | 지역 착근, 이해관계자 만족 | 자율성, 체제 전환 | 임팩트, 확장성, 재무 지속성 |
지적 뿌리 | 협동조합·사회적경제 | 해방신학·종속이론·토착전통 | 경영학·슘페터·자선 |
EMES — 정의하지 않고 지표를 준다
1996년 EU 연구 프로젝트 「유럽 사회적기업의 출현」에서 시작해 국제연구네트워크로 자리 잡았습니다. Defourny, Borzaga, Nyssens가 중심이고, 직접적 계기는 이탈리아 사회적협동조합법(1991)이었습니다.
방법론이 독특합니다. 사회적기업이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고, 아홉 개 지표로 이루어진 이념형을 제시합니다. 어떤 조직이 이 이념형에 얼마나 가까운지를 보는 나침반이지, 통과/탈락을 가르는 체크리스트가 아닙니다.
세 차원으로 정리됩니다. 경제적 차원 — 재화·서비스의 지속적 생산, 상당한 경제적 위험 부담, 최소한의 유급노동. 사회적 차원 — 공동체에 대한 명시적 목적, 시민집단의 발의, 이윤배분 제한. 참여적 거버넌스 — 높은 자율성, 자본 소유에 기반하지 않는 의결권, 이해관계자 참여.
핵심은 집합적 기업가정신과 다중이해관계자 거버넌스입니다. 이탈리아 사회적협동조합이 노동자·이용자·자원봉사자·공공기관을 한 이사회에 앉히는 구조가 원형입니다. 협동조합 전통 위에 서 있되, 조합원 이익을 넘어 일반이익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전통적 협동조합과 구별됩니다.
Economía solidaria — 비공식에서 출발한다
1980년대 부채위기와 구조조정이 만든 대량 실업, 그리고 팽창한 비공식 부문이 배경입니다. 유럽처럼 등록된 법인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는 점이 결정적 차이입니다.
칠레의 라세토는 공동체·협력·동료애를 묶은 'factor C'를 노동·자본·기술과 나란한 생산요소로 놓았습니다. 브라질의 싱어는 룰라 정부 연대경제 국가사무국 초대 수장으로서 자주관리(autogestão) 를 중심에 세웠고, 아르헨티나의 코라지오는 자본의 경제·공공의 경제와 구분되는 '노동의 경제' 를 제시하며 가구를 재생산 단위로 재조명했습니다.
운동과의 결합이 특징입니다. 무토지농민운동, 실업자 운동, 그리고 노동자 회수기업 — 파산한 공장을 노동자가 점거해 다시 돌리는 형태 — 이 이 계열의 상징입니다.
여기에 토착 전통이 들어옵니다. 안데스의 호혜적 노동교환(ayni)과 공동노동(minga), 그리고 부엔 비비르(buen vivir) 가 에콰도르(2008)·볼리비아(2009) 헌법에 명시됐고, 에콰도르는 2011년 민중연대경제법을 제정했습니다.
자주관리는 유럽의 '참여적 거버넌스'보다 급진적입니다. 참여를 늘리자는 게 아니라 위계 자체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지향이 보완이 아니라 '또 다른 경제(otra economía)' 입니다.
영미권 — 사실은 두 학파
하나로 묶이지만 안에서 갈립니다.
수익창출 학파는 비영리조직의 상업 활동에 주목합니다. 기부와 보조금 의존을 줄여 시장 수입으로 지속가능성을 확보하자는 실용적 문제의식이고, 1980년대 사회지출 삭감이 배경입니다.
사회혁신 학파는 개인 사회적기업가에 초점을 둡니다. 슘페터의 혁신적 기업가를 사회 영역으로 옮긴 것이고, 아쇼카·스콜·슈밥 재단이 이 서사를 확산시켰습니다. Dees의 고전적 정의 — 사회적 사명, 기회 인식, 지속적 혁신, 자원 제약에 구애받지 않는 대담함 — 가 대표적입니다.
영국은 별도로 볼 만합니다. 블레어의 '제3의 길' 아래 2001년 사회적기업국이 생겼고, 2005년 공동체이익회사(CIC) 라는 새 법인격이 만들어졌습니다. 자산동결과 배당 상한을 건 형태죠. 이후 사회투자·임팩트투자·사회성과연계채권으로 이어지며 금융과 결합했고, 동시에 공공서비스 외주화와 맞물렸습니다.
결정적 차이는 거버넌스에 무관심하다는 점입니다. 민주적 통제나 1인 1표가 정의 요소가 아닙니다. 무엇을 이루는가(임팩트)를 묻지 누가 결정하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유럽과 라틴아메리카가 공히 중시하는 지점을 비워둔 셈입니다.
한국은 어디에 있나
혼종이고, 그 혼종성 자체가 연구 대상입니다.
2007년 사회적기업육성법은 영미권의 인증·지원 모델을 들여왔습니다. 국가가 '사회적'인지 판정하는 인증제인데, 이는 EMES의 이념형 접근과 정반대입니다. 나침반이 아니라 체크리스트고요.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은 유럽 사회적경제 전통 쪽입니다.
그런데 실제 운영은 강한 국가 주도여서, 아르헨티나·브라질에서 본 하향식 지원의 역설이 그대로 재현될 소지가 있습니다. 게다가 부처가 갈라져 있습니다 — 사회적기업은 고용부, 협동조합은 기재부, 마을기업은 행안부, 자활기업은 복지부.
세 학파 중 어느 것으로도 잘 안 읽힌다는 게 한국 사례의 흥미로운 점입니다.
생각해 볼 점
그라민 준거 문제의 진단이 나옵니다. 노션에 기록하신 관찰 — 그라민이 강한 규범적 준거로 작동하면서 자국 진단의 처방이 다섯 가지로 수렴한다 — 는 영미권 사회혁신 학파의 영웅 서사가 작동한 결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유누스는 개인 사회적기업가 모델의 전형이고, 국제 개발교육 교재가 대부분 이 서사로 쓰여 있습니다.
대안 설계도 여기서 나옵니다. 학생들에게 EMES 아홉 지표로 자국 조직을 채점하게 하거나, 라틴아메리카 자주관리 프레임을 대비시키면 처방이 다양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PSPS 학생 다수가 아프리카·중앙아시아·동남아 공무원이라면 맥락상 라틴아메리카 계열이 가장 가까운데 교재는 영미권이라는 불일치가 있습니다. 이 불일치 자체가 교육 연구 논문의 논점이 됩니다.
새마을금고를 EMES 지표로 재보면 진단이 선명해집니다. 경제적 차원은 충족, 이윤배분 제한도 있지만 일반이익 지향은 약하고(조합원 이익 중심), 다중이해관계자 거버넌스는 없습니다(조합원 1인 1표에 그침). 즉 EMES 기준으로는 사회적기업이 아니라 전통적 협동조합입니다. 이 진단은 "왜 한국 사회적경제 담론에서 새마을금고가 빠지는가"에 대한 이론적 답이 될 수 있습니다.
라이파이젠 연구는 EMES 계보의 원류를 다루는 작업입니다. 유럽 사회적경제가 서 있는 협동조합 전통 자체의 이식 문제이므로, 이 학파의 독자층에 직접 말을 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