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푸드, 학교급식, 친환경농업
먹거리와 SSE — 또 하나의 신뢰재
로치데일 조합이 식료품점이었고 한살림이 유기농 직거래에서 출발했듯, 먹거리는 SSE의 가장 오래된 무대입니다.
이유는 앞서 돌봄에서 본 것과 같습니다. 먹거리는 신뢰재입니다. 안전한지, 어떻게 길렀는지, 어디서 왔는지를 소비자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먹고 나서도 모릅니다.
그리고 교섭력 불균형이 있습니다. 소농은 대형 유통 앞에서 가격 결정권이 없습니다.
이 두 문제가 협동조합과 직거래를 부르는 힘입니다.
로컬푸드 — 완주 모델과 확산의 역설
완주가 한국의 원형입니다. 2012년 용진농협 로컬푸드 직매장이 1호였고, 설계에 결정적 특징이 있었습니다.
대농을 배제하고 소농·고령농만 참여시켰습니다. 생산자가 직접 가격을 정하고 직접 진열하며, 당일 팔리지 않은 것은 회수해 갑니다. 소량 다품목 생산이 가능한 구조를 일부러 만든 것이죠.
이 배타성이 핵심이었습니다. 대농이 들어오면 물량과 가격에서 소농이 밀려나니까요. 앞서 커먼즈에서 다룬 '명확한 경계'가 여기서도 작동합니다.
그런데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취지가 희석됐습니다. 농협 주도로 직매장이 수백 개로 늘었지만, 소농 지원이라는 원래 목적보다 판매 채널 확보가 앞서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직매장끼리 경쟁하고, 물량 확보를 위해 참여 기준이 느슨해지고요.
앞서 규모화 딜레마에서 본 사명 표류가 여기서도 나타납니다.
푸드플랜과 공공급식
푸드플랜은 지역 단위에서 생산·가공·유통·소비를 통합 관리하는 종합전략입니다. 2018년 국가푸드플랜 이후 100여 개 지자체가 수립했고, 공공급식 통합지원센터가 지역 농산물을 학교와 공공기관에 공급하는 통로가 됐습니다.
서울시가 자치구와 산지를 1:1로 매칭한 공공급식 모델이 대표적이었는데, 정권과 단체장 교체에 따라 축소되는 패턴이 여기서도 반복됐습니다.
학교급식 — 공공조달의 먹거리판
무상급식 확산 이후 학교급식은 거대한 공공 수요가 됐습니다. 그리고 조달 구조가 바뀌었습니다 — 학교장이 개별 구매하던 방식에서 학교급식지원센터를 경유하는 방식으로요.
앞서 다룬 우선구매와 구조가 같습니다. 공공이 안정적 수요를 만들어 특정 생산자를 지원하는 것이죠. 그리고 같은 쟁점이 따라옵니다 — 최저가 낙찰과 품질의 상충, 지역 농산물 우선과 조달 공정성의 긴장.
한 가지 덧붙이면, 급식 노동자의 처우도 앞서 다룬 돌봄 노동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조리 노동자의 산업재해가 사회 문제가 된 것이 그 표현입니다.
친환경농업 — 수요에 매인 공급
친환경 인증은 유기농과 무농약으로 정리되어 있고 직불제가 뒷받침합니다.
그런데 성장 동력이 학교급식이었다는 점이 구조적 취약성입니다. 친환경 무상급식이 확대되며 수요가 커지자 면적도 늘었는데, 급식 수요가 포화되자 성장이 멈췄습니다.
즉 친환경농업의 규모가 소비자 시장이 아니라 정책 수요에 매여 있습니다. 앞서 사회적기업의 공공 매출 의존을 다루며 짚은 문제 — 의존의 형태가 바뀔 뿐 자립은 오지 않는다 — 가 농업에서도 나타납니다.
참여인증제 — 먹거리판 관계형금융
여기가 이 주제에서 이론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친환경 인증은 제3자 인증입니다. 독립 기관이 심사하고 인증서를 발급하죠. 그런데 비용이 들고, 소규모 농가에는 부담이며, 서류로 확인 가능한 것만 잡습니다.
대안이 참여인증제(PGS, Participatory Guarantee Systems)입니다. IFOAM이 공식 인정한 방식으로,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농장을 방문하고 서로 보증합니다. 제3자가 아니라 관계가 신뢰를 만듭니다. 한살림 등 생협의 자체 인증이 이 계열입니다.
이 구조가 관계형금융과 정확히 동형입니다.
제3자 방식 | 관계 방식 | |
먹거리 | 유기농 인증기관 | 참여인증제(PGS) |
금융 | 신용평가사 CB등급 | 관계형금융 |
정보 | 서류로 확인 가능한 것 | 현장에서만 아는 것 |
비용 | 인증 비용 | 관계 유지 비용 |
배제 | 소규모 배제 | 관계 밖 배제 |
둘 다 경성정보의 한계를 연성정보로 메우려는 시도이고, 둘 다 같은 약점을 갖습니다 — 관계 밖에 있는 사람은 접근할 수 없다는 것.
CSA와 제휴 — 위험을 나누는 구조
일본의 제휴(提携) 와 미국의 CSA(공동체지원농업) 는 소비자가 선불로 대금을 내고 수확물을 나눠 받는 방식입니다.
핵심은 위험 분담입니다. 흉작이면 소비자도 적게 받고, 풍작이면 많이 받습니다. 생산자가 혼자 지던 기후·병충해 위험을 소비자가 함께 지는 구조죠.
이는 사실상 보험이자 선물계약입니다. 앞서 다룬 공제의 위험 풀링 원리가 먹거리에 적용된 형태이고, 한국 생협이 일본 제휴 모델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계보도 이어집니다.
먹거리 사막 = 금융 사막
앞서 다룬 개념이 그대로 반복됩니다.
먹거리 사막(food desert) 은 신선식품에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을 뜻합니다. 농촌 고령가구가 이동 수단 없이 시장에 갈 수 없거나, 도시 저소득 지역에 신선식품 매장이 없는 경우죠.
금융 사막과 같은 지역에 겹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구가 줄고 수익성이 낮아 상점이 철수하는 메커니즘이 지점이 철수하는 메커니즘과 동일하니까요. 그리고 둘 다 정주 여건을 악화시켜 인구 유출을 가속합니다.
생각해 볼 점
첫째 — 참여인증제와 관계형금융의 동형성이 논문이 됩니다.
"제3자 인증 대 관계 기반 보증" 이라는 틀로 두 영역을 함께 다루면, 정보 비대칭 해결 방식의 일반 이론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영역 모두에서 같은 질문이 성립합니다 — 관계 기반 방식이 실제로 더 정확한가, 아니면 비용이 낮을 뿐인가.
2016년 「비재무적 정보는 중요한가」에서 얻으신 결론 — 현 수준의 비재무정보는 CB등급 이상의 예측력이 없다 — 을 인증에 대응시키면, 참여인증이 제3자 인증보다 실제 품질을 잘 예측하는가라는 검증 가능한 질문이 됩니다.
둘째, 먹거리 사막과 금융 사막을 함께 측정할 수 있습니다. 앞서 금융 사막 연구를 제안드렸는데, 여기에 신선식품 매장 위치를 더하면 복합 접근성 지수가 만들어집니다. 두 배제가 겹치는 지역을 식별하면 통합돌봄이나 지방소멸 대응의 우선순위 설정에 직접 쓰입니다. 시군구 12년 패널이 이미 있으니 결합만 하면 됩니다.
셋째, 로컬푸드가 지역 자금순환의 실증 사례입니다. 앞서 누출과 승수를 다뤘는데, 로컬푸드 직매장은 승수효과를 측정하기 좋은 대상입니다. 대형마트에서 산 1만 원과 직매장에서 산 1만 원이 지역에 남기는 금액이 다르다는 가설을 검증할 수 있고, 직매장 현황이 공공데이터로 공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017년 도자산업 산업연관분석 경험이 여기서 다시 쓰입니다.
넷째, CSA의 선불 구조가 금융 설계 문제입니다. 소비자 선불은 생산자에게 무담보 운전자금을 제공하는 것과 같습니다. 앞서 농신보를 언급했는데, CSA 방식이 확산되면 농업 금융 수요가 어떻게 바뀌는가는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위험을 소비자가 나눠 지면 보증 수요가 줄어들 테니까요.
다섯째, PSPS에서 식량 문제가 중심입니다. 새마을운동이 증산운동에서 출발했고, 개도국 동문 다수가 농업 담당입니다. 먹거리 주권(food sovereignty) 개념 — 비아 캄페시나가 제창한, 충분한 공급을 넘어 누가 먹거리 체계를 결정하는가를 묻는 프레임 — 은 학생들이 자국 농업정책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순서 — 증산 → 시장개방 → 로컬푸드·먹거리주권 — 를 보여주면, 지금 증산 단계에 있는 나라들이 이후에 무엇을 마주할지 미리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