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의 층위 — 어디까지가 협력인가
아른스타인의 참여 사다리(1969)가 여전히 유용한 기준입니다. 여덟 단계를 세 묶음으로 나눕니다.
묶음 | 단계 | 성격 |
비참여 | 조작, 치료 | 참여의 외양 |
형식적 참여 | 정보제공, 상담, 회유 | 듣기는 하나 반영 보장 없음 |
실질적 권력 | 파트너십, 권한위임, 시민통제 | 결정에 영향 |
한국의 사회적경제 협의체는 대부분 '상담' 단계에 있습니다. 뒤에서 근거를 보겠습니다.
공동생산과 공동구성 — 결정적 구분
두 개념이 자주 혼용되는데, 층위가 다릅니다.
공동생산(co-production) 은 오스트롬이 1970년대 시카고 경찰 연구에서 제시한 개념입니다. 서비스 이용자가 생산 과정에 참여하면 서비스 질이 올라간다는 것이죠. 주민이 신고하고 협조해야 치안이 작동하는 것처럼요.
공동구성(co-construction) 은 퀘벡 학파가 발전시킨 개념으로 한 단계 더 나갑니다. 정책 형성 자체에 현장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문제로 볼 것인지, 어떤 수단을 쓸 것인지를 함께 정합니다.
앞서 UN 브리프에서 본 정책 생태계 아홉 영역 중 첫 번째가 바로 '공공정책의 공동구성'이었습니다. 국제 규범이 요구하는 것은 공동생산이 아니라 공동구성입니다.
한국은 대체로 공동생산 수준이거나 그 이하입니다. 집행에는 참여하는데 형성에는 참여하지 못합니다.
한국 협의체의 실제
진단이 명확합니다. 결정권과 예산권이 없습니다.
사회적경제위원회는 조례에 근거해 설치되고 정기적으로 운영되지만, 자문과 심의에 머물고 의사결정 권한과 예산 배분 권한이 없습니다. 정책 협의는 활발히 이루어지는데 그 협의가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 것이죠.
구조적 원인이 몇 겹입니다. 의제 설정권을 행정이 갖습니다 — 안건을 행정이 정하니 현장 의제가 진입하기 어렵습니다. 개최 빈도가 낮고 서면 심의가 많습니다. 위원 위촉을 관이 하니 구성 자체가 통제됩니다. 그리고 부처 간 칸막이와 권력 불균형이 협력의 효과를 제약한다는 지적도 반복됩니다.
개선 방향으로는 실질적 권한 부여가 제안됩니다. 단체장이 공동위원장을 맡고 관련 부서장이 참석하게 하는 방식 같은 것이죠. 위원회의 위상을 자문에서 의결로 올리는 문제입니다.
무엇이 실효성을 가르는가
문헌이 일관되게 지목하는 조건은 넷입니다.
의제 설정권을 나누는가. 안건을 누가 정하는지가 사실상 결과를 정합니다.
예산 권한이 있는가. 참여예산제가 다른 참여 기구보다 실질적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돈을 움직일 수 있으면 참여가 진짜가 됩니다.
사무국이 독립적인가. 행정 공무원이 간사를 맡으면 협의체는 행정의 연장이 됩니다.
정권 교체를 견디는가. 앞서 여러 번 확인한 문제입니다.
국제 사례 — 퀘벡과 발렌시아
퀘벡의 Chantier de l'économie sociale가 공동구성의 대표 사례입니다.
1995년 경제사회정상회의에서 출발해 1996년 상설 조직이 됐습니다. 노동조합, 사회운동, 여성단체, 지역조직, 정부가 함께 참여했고요.
결정적 특징은 정부가 아니라 현장이 주도했다는 점입니다. 사회적경제의 정의를 현장이 만들었고 정부가 그것을 수용했습니다. 위에서 범주를 정하고 아래를 담아낸 한국과 순서가 반대입니다.
스페인 발렌시아도 참고할 만합니다. 앞서 UN 브리프에서 본 대로, 정부(Consell)와 협동조합연합(Confederació de Cooperatives)이 함께 구성한 발렌시아협동조합주의위원회가 격년계획을 공동 승인했습니다. 그리고 각 사업의 담당 주체와 예산을 명시하고 2년 후 평가하도록 설계했습니다.
즉 협의가 아니라 계약에 가깝습니다. 누가 무엇을 언제까지 하고 어떻게 확인할지가 문서에 있습니다.
사회연대경제기본법의 거버넌스 설계
법안은 대통령 소속 사회연대경제발전위원회 설치를 담고 있습니다. 행정안전부 장관이 5년 단위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지자체가 시행계획을 만드는 구조고요.
관건은 위원회의 성격입니다. 대통령 소속이라는 위상은 높지만, 앞서 본 지방 위원회들처럼 자문 기구에 머물면 같은 한계를 반복합니다. 위원 구성 방식, 의제 설정권, 기본계획에 대한 구속력이 시행령에서 어떻게 정해지는지가 실질을 결정합니다.
2026년 개편의 성격 — 정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2026년 정책방향은 "정부주도도, 민간방임도 아닌 균형잡힌 민관협력" 을 내걸고, 공공은 인증·평가를, 민간은 창업지원·컨설팅을 맡는 분담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집행의 분담이지 정책 형성의 공유가 아닙니다.
누가 무엇을 수행할지를 정부가 정하고 민간이 위탁받는 구조라면, 아른스타인의 사다리에서 위로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공동생산은 개선되지만 공동구성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 구분을 흐리면 "민관협력이 강화됐다"는 서술과 "여전히 자문 기구에 머문다"는 진단이 동시에 참인 상태가 계속됩니다.
생각해 볼 점
첫째 — 광주형일자리가 한국에서 공동구성에 가장 근접한 사례입니다.
2020년 「광주형일자리 정책 효과성 제고를 위한 추진전략 및 추진체계 연구」에서 "전략적 접근과 사회적 이해·타협 노력을 통해 확장 가능한 표준적 상생 일자리 모델로 발전시킬 필요" 라는 결론을 내셨습니다.
이 결론이 지금 논의의 핵심을 짚고 있습니다. 광주형일자리는 노동계·경영계·지자체·정부가 임금과 노동조건이라는 가장 다루기 어려운 의제를 함께 결정한 시도였습니다. 자문이 아니라 협약이었고, 실행 조직까지 만들었습니다.
즉 퀘벡의 Chantier나 발렌시아의 격년계획과 같은 계열의 실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광주광역시 일자리위원회 광주형일자리분과 위원장으로 그 안에 계셨습니다.
"한국에서 사회적 타협은 왜 어려운가, 광주는 무엇이 달랐고 무엇이 부족했는가" 를 국제 비교 틀로 다시 쓰면, 국내 정책 사례가 국제 거버넌스 문헌에 접속합니다. 그리고 사회연대경제발전위원회 설계 논의에 직접 기여할 수 있습니다.
둘째, 협의체 실효성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지금 진단은 대체로 규범적 서술입니다. 개최 횟수, 안건 중 현장 제안 비율, 심의 안건의 정책 반영률, 예산 반영액을 지자체별로 수집하면 정량 비교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재정자립도나 지역 SSE 밀도와의 관계를 보면 앞서 다룬 지역 이질성 명제가 거버넌스 층위에서도 성립하는지 검증됩니다.
셋째, 위원회 참여 경험이 데이터입니다. 광주광역시 성과평가위원회, 창업지원센터 운영위원, 동구청 발전혁신위 산업분과위원장을 지내셨습니다. 여러 위원회를 안에서 관찰한 경험은 문헌에서 얻기 어려운 정보이고, 앞서 다룬 교육 연구처럼 참여관찰 기반 연구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넷째, AHP가 위원회 설계에 쓰입니다. 위원 구성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는 앞서 다룬 대표성 문제와 같습니다. 행정·현장·전문가·이용자의 비중을 누가 정하는가. 이해관계자별 중요도 인식이 다르다는 두 논문의 발견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다섯째, PAP 문항으로 OECD 권고 1번을 물을 수 있습니다. "귀하의 나라에 사회연대경제 정책을 논의하는 공식 협의 기구가 있는가. 있다면 현장 조직이 실제로 참여하는가. 그 논의가 정책에 반영된 사례가 있는가." 존재·참여·반영의 3단계로 물으면 형식적 참여와 실질적 참여가 구분됩니다.